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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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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설교
    2014.02.17 20:54

    세리 레위가 신학자 마태가 되다!

    조회 수 170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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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 2014-02-16
    설교구분 주일대예배
    본문 막2:13-17
    설교자 이현기 목사

    말씀: 2:13-17

    제목: 세리 레위가 신학자 마태가 되다!

     

    오늘 본문은 세리 레위를 부르신 내용입니다. 13절에서 17절까지 짧은 구절이지만 제게는 은혜가많이 되었습니다. 이 안에, 예수님의 사명, 진정한 제자도, 하나님의 은혜, 제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축복 등 정말 많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일부 내용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나누었지만 오늘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즉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 아마 엄청난 무리가 그분께로 모여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떠한 건물이나 길거리에서도 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리가 다라는 말은 바닷가에서 거대한 무리들이 그분을 따랐으며 그분 곁에 모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예수님은 말씀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소명은 말씀을 전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실한 종이셨습니다. 즉 가르칠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 순종의 종이십니다.

     

    우리의 사명도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업장에서 일을 하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가르칠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단 한번의 기회라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매 순간 성실함과 순종이 요구됩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있을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사역을 마치고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해변을 따라 걸으시면서 입항하는 배에 부과되는 세금을 징수하려고 설치된 세관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1. 세관에 앉은 레위를 보심.

    예수님은 세관의 일을 맡은 세리인 레위를 보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아야겠습니다. 모든 세리는 유대 사회의 풍토에서는 반역자요 버림받은 자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미움을 받고 배척받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에 자신들의 영혼을 팔아버린 자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은 세금을 자신들이 직접 걷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을 고용하여 대신 걷게 하고 그 중 일정 할당량을 받았습니다. 별도의 급료가 없었던 세리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규정 이상의 세금을 더 걷어 들였고 치부를 하였습니다. 로마에게 세금 100만원 내고 나중에 주민들에게 200만원 걷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차액인 100만원이 내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리들은 더욱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로마에게 동족을 파는 매국노로 손가락질을 받고, 압박자인 로마의 등에 붙어서 자기동족의 피를 빨아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의 도덕성 이전에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로 취급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의 그림자만 보아도 침을 뱉었고 세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철저하고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었는지 당시 유대인들 가운에 이런 속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산에 가면 사자가 있고, 동네에 가면 세리가 있다.” 세리란 사자처럼 동족을 움켜쥐고 뜯어먹는 존재요 더러운 매국노로 몰린 것이고 따라서 법정에서도 세리는 증인이 될 수 없고 나아가 회당 출입도 금지되고 이들이 낸 헌금이나 자선금도 더럽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최대의 욕이이 세리 같은 놈이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합니다. 이들은 헤롯과 로마의 앞잡이였을 뿐만 아니라 합법으로 위장한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곧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영어로 tax-collector, 즉 세금 걷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국세청 직원입니다. 당시 세리는 어부와는 달리 교육을 제법 받은 계층이었습니다. 계산능력과 경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당시 통용되는 모든 언어인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세리는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 대표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세리와 창기와 죄인을 같은 부류, 즉 죄인이요 인간쓰레기 같은 자들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들은 도둑놈에 민족 반역자라는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럽고 추잡한 욕심에 사로잡혀 오직 돈, 돈밖에 모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레위인 것으로 미루어 그는 레위지파에 속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제사장 지파입니다. 신명기 10 8절을 보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기록되었습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택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과 성전을 돌보는 책임을 맡겼던 거룩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 신앙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가문인 거룩한 레위지파의 아들이 어째서 동족을 배신하고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직업을 좋아서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리라는 직업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아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태는 그 인생의 목표를 돈버는 데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을 멋있게 살 수 있다. 가문이 무엇이고, 신앙이 무엇이냐, 어찌되었든 돈을 벌어야 성공한 인생이지 가문을 지키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도대체 내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신앙도 필요 없고, 명예도 체면도 필요 없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고 죄인이라고 해도 좋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레위지파의 아들이 신앙을 버리고 죄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2. 레위를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와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항상 각 개인에게 다가가실 기회를 찾고 계시는지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를 다가르치기를 막 끝내신 후였으므로 아마도 지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르치는 일을 마치고 걸어가시다가 한 영혼이 고통 가운데에서 그분의 관심을 필요로 함을 보시고는 그에게 증거하시고자 멈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가 일하던 세관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은 누구에게 가서 어떤 방법으로 얼마를 뜯어내고 얼마를 로마정부에 바치고 얼마를 내 주머니에 넣을까?' 계산기를 두드리고 앉아있었을 것입니다. 레위는 다른 사람들처럼 애타게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직접 찾아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차별 없이부르십니다.

     

    그 당시 세리라 함은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로서 창기, 도둑, 살인자와 함께 천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세리 레위가 구원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은 그 당시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세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유다 지파 중 가장 거룩한 레위지파에 속했던 레위는 돈을 벌기 위해 세리라는 직업을 택함과 동시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마태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일하고 있었던 세관으로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9:9)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만난 곳이 회당이나 바닷가가 아닌 그가 죄를 짓고 있었던 현장이었던 세관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행동은 그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그런 행동은 그 당시 문화 속에서스캔들이며, 사역을 펼쳐 나가시는데핸디캡이 되는 것임이 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어느 누구라도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차별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모두를 향해차별 없이 또한 예외 없이하나님 나라로 부르시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태도와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세리 친구들이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죄인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죄인과 세리라는 표현으로 15절과 16절에서 3번이나 그렇게 불립니다. 정통 유대인이라면 세리와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하고 제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이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잘 살고 있었다면 굳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병들고 죽어가고 있기에 그들을 살리려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지고 갈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과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족합니까? 죄에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까? 자신이 병들고 부족한 인생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죄인들과 병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가자고 하니까 죄가 많아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몸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씻기 위해서 입니다. 죄가 많아 교회에 못 가겠다는 말은 더러워서 목욕탕에 못 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당연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을 병원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인간은 모두 죄인이요 병든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죄인과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이라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으로 좀 바른 사람, 착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듭니다. 환자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여 병원에 가지 않으니 도무지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란 것은 자기 기준이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이요,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착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는 50 100보입니다. 전쟁터에서 50보 달아난 사람이 100보 달아난 사람을 향하여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격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100보 달아난 사람이 낫습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오셨기에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창기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나오고, 문둥병 자와 혈루증 않는 여인처럼 소위 부정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옵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붓기도 전에 예수님의 발치에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 눈물이 발 위에 떨어지자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연신 그 발에 입 맞추고는 향유를 그 발에 붓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죄가 많다고 손가락질 하였습니다. 아마 그 여인은 창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스스로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였던 한 여인이 주님 앞에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한 여인의 마음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고전이 되다시피 한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책에서 니그렌은 두 종류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 가치를 창조한다.” 에로스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에로스 사랑은 그 사람이 가진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 때문에(because of)’ 사랑입니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람이 아무런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고 무가치한 마태를 사랑했습니다. 마태를 사랑하자 그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건강한 자를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병들고 무력한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충분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의인이요 건강하고 능력 있는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죄인 중의 죄인인 마태, 제사장 가문의 명예를 버리고 세리의 직업을 택했던 마태, 신앙보다는 돈을 더 사랑한 마태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겠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불러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의롭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남보다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처럼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3. 레위의 반응

    예수님의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528절에 보면 그는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고 합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고기 잡는 그물과 배였습니다. 특히 전에 살펴본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배대와 삯군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리 마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세관 앞에서 돈을 거두던 돈 상을 버렸을 것입니다. 세리라는 직업도 버리고 또 그 동안 모았던 큰 재산도 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입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해도 꾹 참고 오로지 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입니다. 이 돈은 그가 누리던 모든 기득권과 편안한 삶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귀한 돈을, 그 피 같은 재산을 이제 다 포기하고, 모든 기득권과 편안한 삶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름에 마태 또한 두 말 않고 따랐습니다. 마태의 결단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한들 그 배와 그물이야 가족의 소유로 남았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다시 어부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직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택은 현명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따라나 섰기에 마태는 위대한 이름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면 그는 평생 그늘진 세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운 이름을 간직한 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레위는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전격적으로 순종하여 좇았습니다. 레위는 부자였을 것인데, 세관을 벗어날 때 그는 로마와 헤롯 안디바와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여생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이제 가난하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는 출세 전망도 밝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즉시 직장과 재정적인 포부와 잘 나가는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삶을 요구하였으며 레위는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료 세리들과 다른 죄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함으로써 그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영적인 재산을 얻기 위해 물질적인 재산을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기득권과 어떤 편안함을 포기했습니까? 이 옛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 줍니다.

     

    4.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한 이들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행하십니다.

    1)마태라는 이름을 주심.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9:9)

     

    그의 본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마태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의 의미가하나님의 은사/선물이기에 예수님께서레위라는 사람에게 그런 의미를 지닌 또 다른 이름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시몬을 향하여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그를 향한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그 이름에 담긴 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뿐 아니라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모두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분이 온전한 응답을 한 자들을 귀히 여기실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맡겨진 역할 완수를 도우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2) 이 은혜가 그를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 그를 따른 순간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생명을 건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가 됩니다. 그래서 후에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3)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생명을 건 전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가 보고 겪은 예수님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하여 위대한 마태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그는 직접 선교지에 나가서 복음 전하는 전도도 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과연 그가 남긴 마태복음은 오늘도 이렇게 찬란하게 남아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4개의 복음서 중에도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전에는 동족 유대인들을 팔아먹던 매국노 마태가 이제 동족인 유대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서를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죄인을 품으면 그들이 의인이 됩니다. 병든 자를 품으면 그들이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그는 돈만 알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뀌었습니다. 복음서 중에 가장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책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산상수훈은 믿던, 믿지 않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모세 오경의 틀에 맞추어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개의 강론집 형태로 복음서를 구성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치 잘 정리해 놓은 곡간 같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님을 율법을 완성한 자로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만 알던 세리 마태를 위대한 신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또 마태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들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그의 이름은 다만더럽고 비열한 세리 레위라고만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기득권과 이익을 다 포기하고 새 삶을 좇아갔을 때 그의 이름은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남겨야 할까요? 정말 우리 이름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우리 후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 원하신다면 당장 옛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여 그 삶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이름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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